평론

미술평론가 신 항 섭

수묵화에 맛은 투명한 물속의 조약돌을 들여다 보는 듯한 맑음에 있다. 색채가 아닌 색채로서의 먹 빛깔은 티가 없어야 한다. 강하면서도 명확해야 하고 힘차야만 먹 빛깔에 생기가 돈다. 먹 빛깔의 생기는 정신의 맑음에 관계가 있다. 삿된 마음이 업어야 정신이 또렷하고 그로부터 맑은 기운이 생기는 것이다. 월하(月下) 박춘근의 수묵화는 흔치 않은 맑음을 가지고 있다.

그 맑음이란 먹 빛깔의 투명도 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형태 해석고 그 형태를 만들어가는 선의 모양새와도 관계가 있다. 시상 및 손의 기능이 무르익어 던져지는 선과 짐짓 꾸미려드는 선에서 느끼는 이미지의 투명성은 엄연히 서로 다르다. 월하(月下) 의 그림이 맑게 느껴지는 것은 꾸미려드는 억지스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허튼 욕심을 부리지 않기에 선의 모양새가 단조롭고 깨끗하다. 월하(月下) 는 실경 산수와 작가로서의 역경을 다져왔다.

그러기에 언제나 현실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림이 허황되지 않고 실제감이 돋보이는 것도 실경에서 취재된 형태와 감정에 충실하기 때문에 월하의 산수화는 관념 산수화의 비현실성을 극복하고 있다.

물론 실경을 대상으로 하되 필요에 의해 가감하기도 한다. 수묵산수화가 가지고 있는 조형공간의 특성에 맞는 구도를 위해서는 부분적으로 자의적인 해석을 덧붙이는 것이다. 월하의 산수화에서 산의 이미지에는 밋밋한 본분형태의 야산으로 특정 지워진다.

한 걸음에 내처 올라갈 수 있는 야트막한 야산은 누구에게나 친숙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산수화의 소재가 될 성 싶지 않은 답답한 산의 모양새를 아주 천역덕스럽게 그려 내고 있다. 그래서일까 고산준령에다 기암괴석의 산수화에 익숙해진 시각으로는 조금은 싱겁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싱겁다는 느낌이야 말로 월하의 산수화가 가지고 있는 멋이자 매력이다. 그는 한국의 산하가 가지고 있는 지형적 특색에 시선을 두고 있다.

물론 한국 산하에도 기암괴석이 있는 풍경이 있다. 하지만 기암괴석 고산준령은 대부분 우리들의 현실생활권에는 멀찍이 떨어져 있다. 따라서 은둔지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실재로 존재하는 경관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실제감이 약하게 느껴진다. 월하는 이 같은 일반적인 인식을 간파했기 때문일까 시선을 현실적인 생활공간으로부터 가까운 곳으로 돌렸다. 그래서 더욱 실제적이다. 한마디로 관념적인 요소를 가능한한 배제 하려는데 기인한다.

월하의 산수화는 마치 갈잎처럼 선의 메침이 날카로운 독특한 필치로 채워진다. 굽은선이 많지 않고 대부분 툭툭 끊어치는 듯이 날카로우면서도 다속적인 직선의 이미지가 강조된다. 부분적으로는 술쉴틈 없을 만큼 강박한 느낌이 들지만은 전체적으로는 시원하다.

표현적인 미진함이 없기에 시각적인 경쾌함이 있다. 호흡이 빠르게 전개되는 짧은 직선이 반복되면서 바위가 자리하고 나무가 들어서는가 하면 숲이 형성된다. 이처럼 담백하면서도 마른 느낌의 선만으로 풍경을 지어내니 맑지 않을 수 없다. 월하는 산수화 작가 이전에 서예가이자 문인화작가로도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비록 세상살이가 자신의 마음같지 않아 20여년간 거의 은둔하다시패 해왔으나 이순(耳順)에 걸맞는 깊이와 폭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외부에 노출되는 일을 삼가 해왔기 때문에 속기를 물리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문인화류에서 어렵지 않게 간취되는 문기는 역시 죽농 서동균 석재 서병오의 향리에서 정신적 기원과 서예에서 닦은 내적인 힘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거칠것 없이 자유로운 운필이 지어내는 힘찬 필선의 맛은 안진경(雁眞卿)체를 통해 터득한 문기의 한 증표일 것이다.

월하는 앞으로 문인화에서 스스로의 존재성을 밝히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투박하면서도 옹골찬 글씨의 맛을 잘 살리려면 미답의 땅을 얻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다. 속진을 털어내는 시원함이 월하의 그림속에 담겨 있다.